신비한 TV 서프라이즈 Ⅲ. 24년간 한 번도 뛰지 않은 축구선수
브라질 출신의 한 축구 선수, 그는 유소년 축구 클럽을 시작으로 세계 유수의 프로 축축구팀에 소속되었는데…
1996년, 긴 축구 선수 생활을 마치고 은퇴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도 그는 24년 동안 단 한 번도 경기에 출전한 적 없었다! 그 사연은?
놀라운 이야기를 소개한다. 할리우드 영화에 등장할 법한 시나리오다. 주인공 이름은 카를루스 헨리케, 별명은 ‘카이저(황제)’다. 24년간 브라질의 보타포구와 플루미넨세, 멕시코, 미국, 프랑스에서 프로축구선수로 뛰었다. 당대 슈퍼스타들과 친분을 쌓기도 했다. 문제는 하나. 현역으로 뛰는 동안, 한 번도 ‘뛰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카이저는 간교한 속임수와 어느 정도의 매력, 그리고 순수한 외양을 잘 이용해 성공에 이르렀다. 현재 리우의 한 체육관에서 트레이너로 일하는 카이저는 선글라스 너머로 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나는 뛰지 않았다. 문자 그대로, 전혀 뛰지 않았다. 왜냐하면 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직업의식도 전혀 없었다. 그냥 재미있게 살고 싶었다.”
뛰어난 재능 하지만 뛰기는 싫어!
카를루스는 1963년 7월 2일 브라질 남부 항구 도시 포르투 알레그레에서 태어났다. 플루미넨시에서 카이저를 지도했던 마르시오 메이라는 ‘브라질 축구의 171번’이라고 부른다. 171번은 사기죄로 감옥에 들어간 죄수에게 부여하는 번호다. 메이라는 “171번은 그를 위한 번호다. 카를루스는 사람의 마음을 다룰 줄 안다. 이야기를 나누기만 하면 상대의 마음을 빼앗는다”라고 말했다. 오늘의 카이저는 부드러운 매력을 발산한다. 체육관의 모든 고객과 트레이너가 그를 좋아한다.
카이저는 요리사인 어머니와 엘리베이터 회사에 다니던 아버지에게 입양돼 리우에서 성장했다. 다른 아이들처럼 맨발로 거리에서 볼을 찼다. 열 살 즈음엔 보타포구 스카우트의 눈에 들었다. 부모는 카이저에게 에이전트를 붙였고, 카이저는 곧 집을 떠나 보타포구 유소년 캠프에 들어갔다.
13세에 부모를 여읜 그는 3년 뒤 멕시코 클럽 푸에블로에 입단했다. “그들은 내 재능을 알아봤다. 내 슛은 강했으니까. 그러나 팀에 도착하자마자 집에 가고 싶어졌다.” 카이저는 멕시코 음식이 싫었고, 볼을 차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고 한다. 머잖아 그는 해결책을 찾았다. 훈련 중 허벅지를 움켜쥐며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쓰러진 것이다. 카를루스의 근육통은 경력이 끝날 때까지 계속됐다.
그를 영입한 모든 감독은 카이저의 근육통에 혼쭐이 났다. 하지만 쓰레기를 영입했다고 인정하긴 싫었기 때문에 ‘곧 뛰겠지’라는 기대를 버리지 않았다. 멀쩡한 카이저는 경기 당일이 되면 부상이 도졌다. 카이저의 연극에 위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리우의 방구AC에 있을 때였다. 경기 막판 팀이 0-2로 뒤졌다. 구단주 앙드라제가 갑자기 카이저 투입을 지시했다. 재빨리 묘안을 짜내야 했다.
카이저는 “내가 몸을 풀기 시작하자 관중석의 서포터즈가 내게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곧바로 관중석으로 뛰어들어 팬들과 싸웠다.” 그는 퇴장당했다. 작전 성공이었다. 라커룸에서 앙드라제 회장이 불같이 화를 냈다. 카이저는 또 한 번 기지를 발휘했다. “최대한 예의를 차려 회장에게 이렇게 설명했다. 13살 때 부모를 잃고 홀로 살아왔는데 팬들이 회장님을 ‘도둑놈’이라고 부르자 본능적으로 몸이 떨렸다. 회장님의 명예를 지켜야 한다는 일념으로 펜스를 넘게 된 것이라고….”
앙드라제 회장은 카를루스를 와락 껴안고 키스를 퍼부었다. 심지어 연장 계약까지 체결했다. 방구AC의 마케팅 책임자 페드로 나르델리는 “다들 아는 이야기다. 그는 놀면서 시간을 보내다 어느 한순간 클럽과 새로운 계약서를 작성했다. 앙드라제 회장은 카이저를 좋아했다. 나중에는 그가 계약 연장을 거부하는 황당 사건도 발생했다. 카를루스는 다른 곳에 가서 다른 사람들을 속이고 싶어 했다. 아무래도… 거짓말에는 유효기간이 있으니까”라고 말했다.
“모두가 내게 싫증을 느껴 쫓아주길 바랐지만 아무도 그러지 않았다”
카이저는 보타포구, 플루미넨세, 바스쿠 다가마 등 브라질 빅클럽과도 계약했다. 계약서가 작성된 후엔 물론 뛰지 않았다. 보타포구와 바스쿠 다가마는 카이저의 계약을 시인도, 부인도 하지 않았다. 방구AC와 아메리카는 카이저의 입단 사실을 인정했다.
익명 선수에 따르면, 카이저는 총 5개 클럽에서 뛰었다. 브라질 국가대표 출신으로 바스쿠 다가마에서 활약한 적이 있는 센터백 히카르두 로차는 “우린 그가 참 재밌는 친구라고 생각했다. 신기하게도 전혀 뛰지 않으면서 용케 잘 버텼다. 축구판을 좋아했던 그는 우리와 어울리기를 즐겼다”고 회상했다.
카이저의 프랑스행을 도왔던 파비우 바로스는 “난 그가 좋았다. 그래서 그에게 기회를 준 것이다. 카를루스는 아작시오에 입단했다”라며 옛 추억을 끄집어냈다. 낯선 땅에서도 카이저의 기행은 멈추지 않았다. 사기 전략은 더욱 다양해졌다. 카이저는 아작시오 구단주의 아내에게 꽃다발을 선물하며 환심을 샀고, 이후 그곳에서 8년을 죽치며 놀았다.
1976년부터 17년 동안 아작시오에서 스포팅 디렉터로 일한 미셸 맨치니는 “바로스는 기억이 나는데, 카이저는 모르겠다”고 말했다. 아작시오 사령탑이었던 뱁티스트 젠틸리도 카이저를 기억하지 못했다. “나는 아작시오 출신이다. 그리고 이곳에서 활동한 브라질 선수는 그리 많지 않다. 아작시오에서 뛴 게 사실이라면 내가 모를 리가 없다. 잠깐 머문 것이라면 모를까, 8년 동안이나 있었는데 존재 자체를 모른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어쨌든 맨치니와 젠틸리는 1980년대에 2명의 브라질 선수가 몇 달 동안 아작시오에 있었다고 말했으니 카이저가 둘 중 한 명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카이저는 미국 텍사스의 엘파소에서 3개월을 보냈지만, 너무 더워 오래 머물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의 주장은 진위 여부를 확인하기 어렵다. 인터넷 이전의 시대에 벌어진 일들이기 때문이다. 바스쿠 다가마와 플루미넨세에서 카이저와 함께했다는 알렉산더 토레스는 “언젠가 프랑스 하부 팀에서 뛰었다고 말했다. 당시는 외국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알기가 거의 불가능했다. 카이저의 주장을 확인할 방법은 없었다. 신문에 실린 사진까지 보여줬으니 그냥 믿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가 단 한 번도 경기에 나서지 않았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듣고도 믿기 어려웠다. 왜냐하면 축구선수는 누구나 경쟁심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선수 시절 브라질 국가대표로도 활약한 헤나투 가우초 감독은 카이저의 절친한 친구 중 한 명이다. 카이저는 클럽이나 바에서 간혹 가우초 행세를 했다. 둘은 약간 닮은 구석이 있다. 가우초는 나이트클럽에서 자신의 이름을 팔며 즐기던 카이저와 마주친 적도 있다. 하지만 상관치 않았다. 카이저의 옛 동료 마우리시우는 “누가 뭐라 해도 그는 소중한 친구다. 또 그 친구는 누구에게도 해가 되는 행동은 절대 하지 않았다. 아무튼 배짱 하나만큼은 대단했다”고 말했다.
보타포구에 있던 1990년대 초반 카이저는 또다시 ‘역대급’ 장난질을 쳤다. 툭하면 라커룸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아 투박한 벽돌 모양의 휴대폰을 붙잡고 누군가와 진지하게 통화하는 것이었다. 계약 조건에 관한 이야기가 오갔다. 다른 클럽 관계자와 이적을 논의하는 듯한 태도였다. 카이저는 때때로 영어를 섞어 쓰기도 했다.
어느 날 트레이너 호날두 토레스가 뒤에 숨어 카이저의 행동을 염탐했다. 그리고 흥미로운 사실을 알아챘다. 카이저의 휴대폰은 가짜였다. 카이저는 “다른 클럽 감독들과 이적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척했다. 다들 내게 짜증을 내서 나를 쫓아내길 바랐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라고 웃으며 말했다.
마우리시우는 “카이저는 사기꾼이었지만 매력적이었다. 우리는 파티와 여자를 쫓아 함께 자주 돌아다녔다. 여자들은 카이저를 좋아했다. 그럴 때마다 그는 골을 잘 넣는 축구선수인 척했다. 엄밀히 말하자면 축구선수가 아니었는데 말이다”라고 회상한다.
“마라도나라고 불렀다. 왜냐면 닮았으니까… 뚱뚱한 마라도나!”
시간이 흐를수록 선수들은 카이저의 기량을 눈치챘다. 1989년 플루미넨세의 피트니스 코치였던 마르쿠스 메이라는 이렇게 말한다. “다른 선수들처럼 카를루스를 훈련시켜야 했다. 그는 그냥 보기에도 뚱뚱했다. 그 검은색 안경에, 매너는 또 얼마나 특이했는지. 다들 그가 웃기는 인간이란 걸 알았다. 어떻게 플루미넨세에 들어왔는지를 아무도 모르는 것 같았다. 입단할 때부터 이미 과체중이라서 도무지 훈련을 받을 상태가 아니었다. 슛은 말할 것도 없고 뛰는 것도 형편없었다.”
선수들은 카이저를 마라도나라고 불렀다. 얼핏 보면 그는 마라도나를 닮았는데, 살이 쪘으니 뚱뚱한 마라도나였다. 훈련장에 카메라가 등장하기만 하면 카이저는 어디선가 귀신처럼 나타나 선수들 틈을 파고들었다. 메이라는 “그는 대화 기술이 좋았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홀리는 방법을 확실히 알고 있는 것 같았다”고 회상했다.
카를루스 프레스테스는 카이저가 가짜로 낙인찍힌 순간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바스쿠 다가마 시절, 훈련 시작 전에 선수 7~8명이 모여 볼 빼앗기 연습을 했다. 카이저가 원 안에 들어가 볼을 빼앗아야 했다. 카를루스 프레스테스는 베베투와 함께 즐겼던 당시를 떠올렸다. “카이저는 원을 빠져나갈 수 없었다. 그에게 벅찬 일이었다. 우리 모두 그가 프로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쉽게 알았다. 프로는 딱 보면 안다. 그래도 카이저는 좋은 사람, 멋진 사내였다.”
알렉산더 토레스에 따르면, 그 시절에는 경기에 뛰지 않는 선수가 스쿼드에 포함되는 일이 드물지 않았다고 한다. “적어도 1980년대에는 카이저 같은 선수가 더러 있었다. 유머 감각이 뛰어나거나 바비큐를 잘하는 등의 특기가 있으면 축구 실력을 크게 따지지 않았다. 심지어 감독도 내버려 뒀다. 경기에 출전하지 않으면서 카이저는 선수단 버스를 타고 원정도 함께 다녔다.”
“죄책감을 느낀다. 좋은 사람들의 기대에 전혀 부응하지 못했다”
2011년 초 정체가 세상에 알려지면서 카이저는 일약 유명인사가 되었다. 브라질 방송사 에 출연해 1984년 코파리베르타도레스 우승팀(인디펜디엔테) 스쿼드에 자기 이름이 있다고 주장했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당시 인디펜디엔테에 카를루스 헨리케라는 선수가 분명히 있었다. 하지만 이름의 주인은 동명의 아르헨티나 선수였다.
카이저는 늘 유쾌한 모습으로 주위에 웃음 바이러스를 퍼트리며 산다. 원하는 대로, 뜻하는 대로 발걸음을 옮기며 후회 따위는 남기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본인은 부인했다. 카이저는 속임수로 점철된 지난 삶이 부끄럽다고 했다. “죄책감을 느낀다. 살아오면서 좋은 사람들의 기대를 많이 받았지만 전혀 부응하지 못했다.”
동료 카를루스 프레스테스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카이저를 이렇게 정의했다. “여러 클럽에 입단한 것부터가 대단하다. 긴 시간 동안 프로축구선수 신분을 유지한 사실은 더 대단하다. 실전에 나선 적이 거의 없으면서도 자신을 재능 넘치는 선수로 포장했고, 더 나아가 사람들이 믿게끔 만든 점은 더더욱 대단하다. 카이저는 예술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