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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한 TV 서프라이즈 미지의 여인 이반 크람스코이 안나 카레니나초상화 비극 불륜녀 불운을 부르는그림

익스트림서프라이즈 MBC신비한TV서프라이즈회차819회 엠비씨2018년 6월 24일 일요일프로그램소개


Ⅱ.  미지의 여인

1880년대 유럽, 한 남자의 집이 화마에 휩싸인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는 모든 것이 
한 점의 그림 때문이라고 말했는데… 
불운을 부르는 그림 <미지의 여인> 이야기!

모스크바 트레치야코프 미술관에서 이 그림을 처음 본 사람들은 도도하면서도 애수를 띤 여인의 촉촉한 눈매와 그 아름다움에 매료당하지 않을 수 없다. ‘너희가 나를 아느냐’며 도전하듯 던지는 반쯤 내리뜬 시선에 약간 당혹스러움을 느끼면서도 여인의 정체를 궁금해하는 관람객들에게 화가는 "미지의 여인"이라고 이름 붙여놓고는 더 이상 알려고 하지 말라는 듯 의혹들을 덮어버린다.


1883년 러시아 작가들이나 비평가들의 인물화로 유명했던 I. N. 크람스코이(1837-1887)가 이 작품을 발표하자 몇몇 비평가들은 "알 수가 없다: 이 부인이 누구인지, 정숙한 여인인가, 아니면 고급 창녀인가, 하지만 그녀 안에 완전한 한 시대가 드러나 있다" 고 말했다. 

유명한 미술 평론가였던 V. V. 스타소프는 ‘마차에 앉은 고급 창녀’로 단정해 버렸고, 미술 수집가인 P. M. 트레티야코프도 그 의견에 동의하면서 크람스코이의 이전 작품들이 더 맘에 든다고 했다. 크람스코이는 실제 인물인지 아닌지도 밝히지 않아서 어떤 비평가들은 F. M. 도스토예프스키의 <<백치>>의 여주인공 나스타샤 필립포브나, 또는 L. N.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의 안나 라고도 했고, 어떤 이들은 실제 존재했던 사교계 상류층 부인들의 이름을 거론하기도 하였다.


이 여인은 대체 누구일까? 

전체적으로 보면 흐릿한 도시 전경과 검은 색 옷을 입은 또렷한 여인이 대조를 이루어 그녀의 아름다움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배경은 크람스코이가 주로 작품 활동을 했던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어디쯤인 것 같다. 뒤의 건물들은 마주보고 있는 모습이다. 양쪽 건물들이 다 보이는 것을 보면 길의 중앙이나 다리 위쯤인 것 같다. 희뿌연 건물들이 약간 내려앉은 듯 하고, 여인은 도시 위로 마차를 타고 비상이라도 하는 듯이 하늘과 맞닿은 모습이다. 여인은 위에 앉아 아래의 우리를 약간 내려다보고 있는 것 같아 다리 위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역시나 찾아보니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중심가인 네프스키 대로에서 폰탄카 거리를 가로지르는 아니츠코프 다리라고 한다.


네바 강을 따라 40여 개의 섬들로 이루어진 ‘북구의 베니스’ 상트 페테르부르크는 안개가 많은 도시지만 시가지 전체가 뿌옇게 덮여 있는 시간은 새벽녘이나 이른 아침일 것이다. 여인은 공교롭게도 다리 중앙에 앉아 있다. 이 여인은 새벽까지 이어진 사교계 모임을 마치고 집으로 향하는 중인가? 아님 어느 귀족 살롱에 초대 받아 다녀오는 고급 창녀인가? 아니면 이른 새벽에 사랑하는 정부와 도망이라도 치기 위해 집을 나설 수밖에 없는 사연을 가진 여인일까?


여인의 모습은 매우 세련되고 감성적이지만, 무엇인가 편안한 느낌을 주지는 않는다. 갸름한 얼굴선, 약간 거무스름한 피부, 벨벳처럼 부드럽고 숱이 많은 눈썹, 오만하게 약간 내리뜬, 하지만 고독과 슬픔이 묻어 있는 촉촉한 갈색 눈, 또렷한 콧대와 콧망울, 아담하고 생기 있는 새초롬하게 다문 입술, 뒤로 가지런히 손질한 짙은 색의 머리, 다소곳하지만 꼿꼿한 앉음새. 어느 정도의 신분 또는 혈통에 근거한 것이든지, 아니면 스스로의 아름다움에 대한 찬사에 익숙해진 원숙한 여인에게서 나올 수 있는 약간의 오만한 표정. 무엇보다도 그 표정은 한 번 본 사람들에게 많은 상념들을 불러일으킨다.


여인의 차림새를 살펴보면 우아하고 가벼운 털로 장식한 프란치스크 모자, 최상의 가죽으로 만든 스위스산 장갑, 담비털로 장식한 스코벨레프 외투, 파란 공단 리본을 단 머프, 황금 팔찌 등 이 모든 것이 1880년대 귀부인들의 값비싼 최신 유행 아이템들이었다고 한다. 그

러나 이것이 그녀가 상류 사회에 속해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 오히려 반대일 수도 있다. 그 당시 러시아에서 최상류층의 불문율은 유행을 너무 철저히 따르지 않는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여인에게서 그녀가 속해 있는, 아니면 속하고 싶은 세계불운안나 카레니나, 

그녀가 좌우될 수 밖에 없는 그 세계에서 오히려 소외당한 외로움이 느껴진다. 보는 사람들에게 자기가 상처를 주었을 지도 모르는 보호 받지 못한 여인에 대한 연민을 불러일으킨다. 그 오만한 표정은 오히려 밑바닥까지는 자신을 내려놓고 싶지 않은 안간힘의 다른 모습 같다. 


아니츠코프 다리는 유명한 조각가 P. K. 클로트의 작품 <말의 조련>상이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1875-77)에서 안나를 유혹했던 브론스키가 그토록 승마에 매혹되었었다는 사실을 상기하면 이 다리를 배경으로 크람스코이가 <미지의 여인>을 그린 것을 우연으로 보기보단 크람스코이가 안나란 걸 암시하기 위해 숨겨 둔 장치는 아니었을까?


<<안나 카레니나>>에 나타난 안나의 모습은 모스크바의 상트 페테르부르크 기차역에서 그녀를 처음 만난 브론스키에 의해 묘사된다. 브론스키는 첫 눈에 “상류사회에 속하는 사람”으로 단정 지으면서 “약동하는, 생생한 표정”과 “짙은 속눈썹 때문에 강하게 빛나는 잿빛 눈”, “보일락말락한 미소를 띤 붉은 입술”에 끌렸다고 말한다.

그리고 무도회에서 검은 옷을 입고 나타난 안나의 아름다움이 키치(안나 카레니나 올케의 동생)의 질투어린 시선으로 그려진다. 키치는 “가슴이 깊게 팬 검정 벨벳 옷을 입고 오래 된 상아처럼 잘 닦아 다듬어진 풍만한 어깨와 가슴, 섬세하고 조그마한 손을 가진 둥글둥글한 팔”, “가발을 전혀 섞지 않은 새까만 머리칼”, “눈에 띄지 않게 묶인 머리 모양”, “그녀의 뒷머리나 관자놀이에 흘러내려 그녀에게 멋을 더해주는, 제멋대로 난 고수머리의 조그마한 고리들”에 감탄하면서 안나를 응시하고 있다. 안나에게는 화려한 레이스를 두른 검정 옷도 단순한 액자에 불과하다고 생각한 키치의 생각은 그림 속 <미지의 여인>과 상통하는 부분이다.


안나의 비극적 삶 또한 그림 속 여인의 뭔지 모를 애수와 맞닿아 있다. 브론스키를 만난 안나의 첫 감정은 “따뜻하다는, 따뜻하다 못해 타는 듯이 뜨겁다”는 것이었다. 그 뜨거운 브론스키의 열정 속으로 용해되어 버린 안나는 더 이상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브론스키가 경마장에서 낙마하자 남편 앞에서 그를 걱정하는 울음을 터뜨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마차’안에서 브론스키에 대한 사랑을 고백해버린다. 안나 의 결혼생활에 위기가 닥친 게 ‘마차 안에서의 고백’이었다는 것도 크람스코이가 염두에 두었을 수도 있다.


고백을 들은 “냉정하고 사려 깊은” 남편 카레닌은 어째서 아내가 그런 관계를 남들처럼 감추지 못하고 밝혀버렸는지 괴로워하면서도 가능한 모든 경우의 수를 고려해보기 시작한다. 첫 번째는 결투다. 그러나 그는 “본래 소심한 사람”인데다 “죄를 지은 아내와 아들에 대한 자기의 관계를 결정하기 위해 사람을 살해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가” 라고 자문하면서 그와 같은 일은 “헛된 명예를 얻으려고 하는 것”이라고 단정한다. 두 번째는 이혼이다. 이 방법도 그를 만족시키지 못한다. 중요한 목적인 “소란을 최소한도로 그치게 하는 것”이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이혼을 하게 되면, 아니 이혼 수속을 하기만 해도 아내는 남편과의 관계를 끊고 애인과 결합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세 번째는 별거이다. 그러나 이것도 이혼과 마찬가지로 “아내를 브론스키의 포옹 속으로 내던져버리는 격”이어서 포기한다.


그가 내린 결론은 “사건을 세상에 비밀로 붙여둔 채 그들의 관계를 끊도록 온갖 수단을 다 강구”하고 아내를 벌하기 위해 “지금과 마찬가지로 그의 곁에 그대로 붙잡아 두는 것”이었다. 이것이 카레닌이 온 가족들을 괴로움 속으로 몰아넣은 안나에 대한 벌로 생각해낸 해결책이며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것이 훌륭하게 처리되고 관계도 이전으로 되돌아가겠지”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결국 카레닌은 안나와의 이혼을 결정하게 되고, “저 사람은 그 사내하고 어울리겠지. 그리하여 1,2년쯤 지나면 사내한테 버림을 받든지 아니면 자기 스스로 다시 다른 사람과 새로운 관계를 맺겠지” 라며 안나의 미래에 대해 냉정한 예측을 한다. 왜냐하면 그 당시 교회법은 이혼을 하더라도 아내는 남편이 죽을 때까지 재혼을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안나는 카레닌이 이혼을 해준다고 하더라도 브론스키와 합법적으로 재혼할 수는 없다. 그의 정부밖에는 될 수 없는 것이다.


안나는 결국 세상이 그토록 감탄한 자신의 아름다움을 기차바퀴에 뭉개버림으로 가장 잔혹한 파멸을 맞이한다. 

안나가 죽자 브론스키는 자비로 의용군을 모아 터어키 전쟁에 자원하여 떠나감으로 명예로운 구원의 기회를 얻게 되고, 카레닌은 브론스키와 안나의 딸(안나)의 양육권을 받아들이게 됨으로 또 다른 구원의 길을 얻게 된다. 결국 파멸한 사람은 안나 뿐이다.


공교롭게도 브론스키와 카레닌의 이름이 알렉세이로 똑같듯이, 남편이든, 정부이든 안나의 편이 되어주지 못하고 결국 죽음으로 내 몬 남성들, 안나의 딸 이름이 또한 안나이듯이 사회적 약자의 삶을 살 수밖에 없는 같은 운명의 여인들, 사회적 편견, 시대적 제약들을 톨스토이는 사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톨스토이가 작품 제목을 <<안나 카레니나>> 라고 붙인 이유도 결국 안나는 죽어서도 “카레니나”라는 성으로 대변되는 현실을 벗어나지 못한다고 못 박은 것 같다.


그런 여인의 삶을 크람스코이는 안나의 초상화를 그려내어 세상 앞에 던져 놓은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크람스코이가 톨스토이의 ‘안나’를 모델로 <미지의 여인>을 그렸든, 그 어떤 다른 여인을 그린 것이든, 19세기 말 러시아라는 불완전한 현실 속에 내던져진 아름다운 여인들의 운명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 같다. 

<미지의 여인>은 다리의 중앙에 앉아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인생의 다리에선 어디를 건너려고 하고 있었을까? 


그녀는 유부녀에 아이 엄마, 게다가 상류 사회에서 주목받는 여인이지만 

기계와도 같은 남편 때문에 진정한 삶의 이유를 찾지 못하다가 어느 날 

우연히 만나게 된 브론스키라는 군인과 열렬한 불륜에 빠져든다. 

하지만 당시의 가부장적 사회상 때문에 사회에서 매장당하는 처지가 되었으며 

당면한 현실의 냉혹함에 삶의 의지가 꺾인 그녀는 돌진하는 기차에 몸을 던져 생을 마감했다.